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1세 (문단 편집) == 평가 == 결론적으로 조지 1세는 영국 국왕이긴 했으나 실질적으론 계승 순위에 걸려 말년에 자리만 맡아줬을 뿐, 그의 정체성과 업적은 영국의 왕이라기보단 하노버의 선제후였다. 조지 1세의 혈통을 보자면 외할머니쪽이 앤 여왕의 증조할아버지 제임스 1세의 딸이긴 했으나 나머지(4분의 3)는 죄다 독일인의 피가 흐르는 4분의 1만 영국(잉글랜드+스코틀랜드+헨리 7세에게 받은 웨일스) 혈통에 해당하는 쿼터였다. 일반인이어도 쿼터쯤 되면 그 나라에 대한 정체성이 거의 옅어지는데 심지어 조지 1세는 하노버를 다스리는 군주였으니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얼마나 옅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영국 왕이 된 것도 54살의 나이의 일이니 말이다. 다만 하노버는 훗날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과정에서 흡수되었고, 영국은 훗날 '[[대영 제국]]'이라고 불리며 세계를 호령하는 패권국으로 성장한 데다가 지금까지 왕정이 남아있다보니 하노버 선제후가 아닌 영국 국왕으로서의 조지 1세가 기억될 일이 훨씬 많은 것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철저히 [[영국/역사|영국사]] 관점에서 평가하여 조지 1세를 순 [[허당]]으로 묘사하는 역사 만화도 있으며, 국내 [[역덕후]]들에게도 '영어도 못하는 영국 왕' 정도로 취급돼서 어딘가 모자른 취급을 받는 편이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아예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난 영어도 모르고 영국 사정도 잘 모르니 니들끼리 의회에서 수상 뽑고 국정 알아서 해라. 난 가만히 있을란다." 하고 떠넘기는 모습으로 나온다. 후술하겠지만 언어도 어느 정도 문제는 되었겠으나 그것이 조지 1세가 영국 정치에 무관심했던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조지 1세만 특별한 게 아니라 유럽에는 다스리는 지역 언어를 모르는 군주가 많았으며 그럼에도 명군이 된 경우도 많이 나왔다. 초창기 [[노르만 왕조]] 및 [[플랜태저넷 왕조]] 초기 잉글랜드 국왕들도 프랑스어만 썼으니[* 다만 노르만 왕조는 [[노르만족]]의 정복왕조였고 플랜태저넷 왕조 또한 그 노르만 왕조의 뒤를 이은 프랑스계 왕조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외국 출신 군주가 자국어 못하는 건 유럽에서는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당시 유럽 왕족과 귀족 및 상류층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어가 기본이었고 프랑스어로 소통하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조지 1세가 영국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는 언어보다는 그냥 본인이 나이도 있고 스스로를 영국 국왕보다는 하노버 선제후로 여겼고, 영국이라는 ''''이역만리 타국'의 정치 문화와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어로 소통이 된다곤 해도 이는 신하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지 국내외 정치 현안과 중대사안들을 이해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정치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게 여러 문제가 각계각층 사이에서 얽히게 마련이며 제대로 된 정치를 하려면 그 나라의 법률, 문화, 제도, 인사 등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조지 1세가 맡은 역할은 어느 정도 눈치를 보면서 흐름에 맡겨도 될만한 말단직이나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되는 명예직도 아니고 엄연한 한 나라의 '국왕'이었다. 도저히 주도적으로 뭘 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으로 비유하자면,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나 [[헌법재판소]]가 무슨 기관인지 [[대법원장]]은 어떤 권한을 지녔고 국회의 예산 심사는 어떤 절차를 거치는지, 현재 국회의원 중에서 누가 가장 핵심 인사이며 정당 별로 계파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도 잘 모르는 외국인이 지도자가 된 격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단순히 알아보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이를 잘 활용해서 고단수의 '정치'를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게다가 조지 1세가 영국 국왕으로 즉위할 당시는 패기있게 뭘 새롭게 배워서 시도해 볼만한 젊은 나이도 아니었고 무려 54세의 나이였다. 여기에 더해 다른 유럽의 절대 왕정들과 영국은 여러모로 정치 환경이 크게 달랐기 때문에 언어도 어느 정돈 문제가 되었다. 조지 1세는 궁정에 신하들이 출근해서 왕과 소통하는 독일권 왕정식 통치 방법에 익숙해 있었으며, 임금이 직접 의회로 행차해서 신하들을 만나러 가는 의회 정치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하노버에서는 절대군주로서 국가 중대사를 모두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의회가 중대사를 결정했고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이 또한 위에서 언급한 '외국인' 군주들과 조지 1세의 환경이 달랐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영국이 왕의 권한이 많고 왕이 주도하는 국정회의에서 현안이 결정되는 나라였다면 신하들이 왕을 알현하여 프랑스어로 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의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였기 때문에 막상 조지 1세가 의회에 출석했어도 의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이나 표결 등 대부분의 절차는 영어로 이루어졌다. 중요한 내용은 프랑스어로 통역해줬다 할지라도 흐름을 읽고 거기에 주도적으로 끼어들기엔 여러모로 불편함이 많았다. 따라서 조지 1세가 이런 이상한 제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영국 통치에 흥미를 잃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지사. 이러한 이유로 펼쳐진 조지 1세의 '전격 위임 통치'가 오늘날에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바로 왕이 의회에 통치를 전격으로 위임하면서 '''영국식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법학]], [[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조지 1세의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만든 업적이다.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헌법상으로 규정된 [[상징적 국가원수]]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중세 일본의 [[천황]]이나 [[피렌체 공화국]] 등 국가원수가 상징에 불과했던 사례가 여럿 있었지만 구조가 그렇거나 특정한 사정이 있는 등이었지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였고 시기에 따라 실권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요약하자면 조지 1세는 늘그막에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영국의 국내 정치에 비교적 무관심 했던 것뿐이며, 하노버 공국의 군주로서의 게오르크 1세는 명민함과 군사적 용맹함을 아울러 갖춘 뛰어난 군주였다. 게오르크 1세로서는 여러 전쟁에 참여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특히 [[브레멘]] 일대를 병합하고 나아가 숙원이었던 북해로 진출하는데 성공하면서 하노버의 뿌리이자 중세 시절 유럽을 호령했던 [[하인리히 사자공]] 시절의 작센[* 오늘날의 [[니더작센]]과 [[홀슈타인]] 일대. 오늘날 영국의 뿌리가 된 앵글로-색슨족 중 색슨족이 이 곳 출신이며 원래 작센을 가리키던 이 곳이었다. 사자공의 영지가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 의해 공중분해된 후 영지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사자공의 가문이었던 [[벨프 가문]]이 작센 대신 [[브라운슈바이크]]라는 이름을 쓰고, 오늘날 [[작센안할트]] 일대를 통치한 아스카니아 가문이 작센 공작을 칭하면서 작센의 위치가 이동했고, 오늘날의 [[작센]]은 15세기 초 [[독일왕]] [[지기스문트]]가 [[후스 전쟁]]에서 자신을 지지한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작센)|프리드리히 4세]]에게 대가 끊긴 아스카니아 가문 작센-비텐베르크 가계가 가졌던 작센 선제후 직위와 작센-비텐베르크 공국을 하사하면서 과거 마이센 변경백국(Markgrafschaft Meißen)이라 불리던 지역이 최종적으로 작센이 되었다.]의 영광을 재현했다. 영국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외침의 우려가 거의 없었던 반면에 내륙국인 하노버 공국은 유럽 대륙 복판에서 여러 나라에 둘러싸여 있어서 수시로 영토 전쟁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당시 군사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호전적인 [[프로이센 왕국]]과 동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하노버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다.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 발달했으면서도 대양으로의 직접적인 출구인 서북 독일로 진출을 노리고 있었으며 때문에 이에 하노버 공국을 끊임없이 노리고 있었다. 실제로 1795년에 프로이센은 하노버를 잠시 합병한 전적이 있으며 끝내 1866년 프로이센은 하노버를 완전합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오르크 1세의 군사적 진출은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지속된 하노버 왕국 영토의 근간을 확립했다.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방국가 중 하나였던 하노버 선제후국의 역사보다야 영국의 역사가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잘 알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상 말년에 자리나 맡아준 국왕직이 인물 평가를 낮추는데 매우 크게 작용하는 셈이다. 허나 말년에 잘 모르는 낯선 정치 환경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지 하노버 군주로서의 업적은 그렇게 낮게 평가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